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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color-light

Mina Shim

2021.09.23 - 2021.10.23

소거의 흔적: 시각의 사유공간
 

김최은영(미학, 경희대 겸임교수)


  지워버리는 것. 사유를 시각으로 드러내는 회화 작업을 소거(消去)라 칭했다. 게다가 화면은 지웠는지 쌓았는지 구분이 힘든 견고한 붓질의 중첩 다. 분명한 것은 직관으로 감지할 수 있는 공간성이다. 심미나는 화면에서 특정한 개체 혹은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작가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무엇’. 그러나 분명 실존하는 ‘그것’을 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종종 모호한 것들을 경계하거나 확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꺼리곤 한다. 예술도 예외는 아니다. 이론과 사유의 발전은 이러한 경향을 부추겼는데 실상 그 대상의 본체인 감정, 감각은 계기판의 숫자처럼 명료할 수 없다. 필자는 심미나의 작업을 보며 매우 오랜만에 원론적인 시각 감각과 시지각으로 알 수 있는 것들, 비계량의 시각적 공감이 소통되는 이유 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객관적 정보가 매우 적은 화면에서 색, 붓질, 속도, 방향, 밀도만으로 얻어낼 수 있는 감각들은 생각보다 크고 넓었다. 오히려 특정 형태가 없기 때문에 제공 받은 화면 정보는 추리나 연상, 판단까지 이르지 못하고 작품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된다. 결국, 작가는 단순한 감각과 지각만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화면의 전체적인 관계들을 정신적으로 파악하는 직관적 미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거 시리즈의 작품 중 <형태대로>의 경우 색감이 주는 힌트 때문에 바다 혹은 물과 관계된 ‘무엇’이라는 허술한 결론으로 다다르기 쉬운데 같은 연작으로 보이는 <청복>을 통해 단순한 시각적 정보가 얼마나 위험한 판단에 이르게 되는지 깨닫게 해주며 작품을 다시 볼 계기를 만들어 낸다. <청복>은 <형태대로> 보다 훨씬 작위적인 붓질이 반복됨을 드러내 주며, 단순한 무엇의 은유나 상징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반복된 붓질은 속도도 눈여겨 봐야한다. 급하지 않고 느리고 멈춤과 다시 움직임이 반복된다. 시간을 두고 생각을 쌓았다. 혹은 시간을 들여 생각을 지운 것이기도 하다. 서두르지 않는 화면은 감정의 전이가 수월하다. 감상자 역시 급한 속도가 아닌 느린 호흡으로 화면을 대면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각적 정보가 거의 없는 <형태대로> 같은 작품 제목을 통해 반어(反語) 혹은 단순한 정보의 오류를 방지하는 작가의 목적성이 일부분 드러나기 때문에 속도방지턱처럼 사유 역시 덜컥거리며 다시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미나의 화면은 함축과 은유의 시각물이다. 창제작자가 구성한 완성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닌 한 단어, 한 문장 속에 쉬고 싶은 부분을 독자가 조절하며 읽어나갈 수 있는 시언어(詩言語)와 유사하다.

  작가가 말한 소거의 사전적 의미는 지워 버리는 것. 또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며, 흔적은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라는 뜻으로 선행구조를 갖는 뜻이 되어 버린다. 화면을 가득 채운 붓질은 무언가를 지우는 행위로 시작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우는 행위에 선행되어야 할 원래 있었던 무엇은 애초에 화면에선 존재하지 않았다. 즉, 물질적인 것을 지우는 행위가 아닌 정 신적인 것을 지우는 행위를 작가는 소거라 명명했을 터인데 이 사유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낸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일련의 소거 시리즈라 볼 수 있는 작업들인 셈이다.


  게다가 작가가 설정한 이와 같은 시각적 사유 공간에 동의한다면 감상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제공받는 구조다. 특정하지 않는 대상, 비형태적 표현, 지시성을 획득하지 않는 것들을 그린다는 일은 그렇지 않는 작업보다 모호하고 객관화되지 어렵지만 바로 그러한 지점 때문에
감상자의 사유적 개입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고 감정적 동의가 우월하게 획득된다.

  작가도 어쩌면 우연처럼 만났을 이 시각적 공간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치열하게 오랫동안 만진 화면은 지우고 싶은 우리 모두의 ‘무엇’을 상기시키거나 ‘그것’ 때문에 시작된 ‘무엇’을 기억하게 한다. 마음이 움직이는 일. 많은 예술이 소통을 종착지로 선택한 이유다. 멈추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계량할 수 없었던 작가의 고민이 잘 보이는 작업은 예술이 존재하는 원론적 이유를 환기시킨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확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재물음, 무엇과 무엇의 사이.

  심미나의 <흔적>과 <형태대로> 그리고 <본래>는 결국 필자의 ‘무엇’, ‘그것’, ‘어디’이며 이 단어들은 우리 모두의 단어가 될 확률이 높다. 소거의 흔적은 타고 남은 찌꺼기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하는 모두의 사유공간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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